보건소 분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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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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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나이 스물 다섯살 때
그 시절 이전부터 가정에서 분만을 하다가

잘못되는 확율이 높아
각 보건소마다 분만실이 있었습니다.


산모가 분만하고 집으로 갈때
건강보험증이 있으면 8,000원
건강보험증이 없으면 36,000원으로 기억합니다.


조산사 3명
조산사 계장님은 평일 근무
(세월이 지나 계장님은 현재

보건소장님이 되셨어요 ~ 축하합니다.
저도 계속 근무했다면 고혈압 당뇨관리

금연교육하며 살고 있었겠네요 ㅋ)
2명의 조산사가 이틀에 한번

저녁 6시부터 다음날 9시까지
보건직 한명씩과 근무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신생아는 몸길이의

1/3이 머리라서 머리만 나오면
그이후는 힘을 빼고 입으로

바람을 빼야 회음부위가 온전한데
어깨 나올때까지 계속 힘을 주면

이리저리 찢어져 고생을 많이하였기에
산모 고생을 덜기 위해 호흡법 1회/주 실시
(통증 시간 반으로 줄어들만큼 효과)
집에서도 연습하여 병원가서 분만이

수월하였다는 소식을 접하면
감사한 마음이였습니다.


눈이 하앟게 내리던 겨울밤

보건소로 트럭이 급하게 들어왔습니다
나가보니 산모가 3째 아기를

예정일 몇일 남기고 양수가 터져
오는 도중 차안에서 아기가

나왔다며 엉거추춤 서있고
하얗게 내린 눈위에 양수가 뚝뚝

떨어지는 상황.
급히 태줄로 연결된 신생아를 손으로 받치고

산모를 부축하여 분만실로 옮겨
추위에 피부가 푸른빛을 보이는

아기는 태줄 끊고 보온 먼저 시키고
산모 태반 정리하고 찢어진

부위 봉합했던게 생각이 납니다.


네째 아기 분만한 산모는

정이 슬퍼 물어보니
결핵 걸린 자신과 집안 형편이 어려워

스위스로 입양할 부모가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곤히 자고 있는 아기를 보며 여러가지

착찹한 마음이였던것도 생각납니다.


보건직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산모가 왔습니다.
분만대로 옮기자 마자 시간 없어

관장도 못했기에
똥과 함께 아기 머리 나오고

탯줄자르고 아기 입코에 있는 분비물
스포이드로 정리하고, 보온시키고, 태반 꺼내고,
찢어진 부위 봉합하고 처리하려니
분만실 밖 보호자인 시어머니에게

주방 가스에 아기 목욕물 데우라고
큰소리로 말했더니 퇴원하고

동네 보건진료원에게 엄청 독하다고 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당시 건강하게

퇴원한것만으로도 만족하였습니다.



농촌이라 몸을 많이 움직이는

산모는 분만도 순식간에 이뤄지기에
분만실 도착하자마자
화장실 가는 산모는 위험합니다.
산모가 안보여 화장실에 가보니
양변기에 아기가 나와 있어 건져서

옮겼던 기억도 있습니다.


직원이 둘이라 분만 끝나고 시간 나는

사람이 미역국을 끓입니다.
미역에 들기름 국간장이 전부인데

새벽 3ㅡ4시에 끓여 산모 주고
우리도 배고파 먹는 미역국은 맛있습니다.
가끔 거울 보면 얼굴에 피가 튀겨

있는지도 모르고 먹기도 합니다.



분만진행 중 태아 심박수가

불안정하여 태아가 위험하거나
분만후 하혈이 멈추지 않아

산모 상태가 위급하여
도시 큰병원으로 옮기는 한시간 가량
 

산모와 보호자 우리 모두는
피가 마르는것 같은 심정으로

이송도 여러번 했습니다.


지금 펼처 놓고 보니 직접

손으로 받은 아기가
백여명은 넘는데 새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오로지 즐기지는 못했습니다.
산모와 아기 목숨을 책임져야하는 입장이였기에
그 시절 꿈속에서는 산모와 아기가 잘못되어
감옥에 갇히는 꿈도 여러번이였으니

입원하는 순간부터
엄마와 아기가 건강하게 퇴원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매번 염원했고,
바람이 이루어져 근무하는 동안 잘지낼수 있었던
모든것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감사한 마음 가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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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흘러

지금 나와 내 가족의
손가락을 생각합니다.
10개 인것만으로도.
눈코입 똑바로 있는것만으로도
진짜 감사한 일이였습니다.